주의-온통 스포일러.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어느 날, S군이 와서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영화를 봤다고 했다. 영화취향이 같을 수는 없지만 -_- 평소 영화 얘기를 서로 자주 해온 터라 무슨 영화냐고 물었다. 솔직히 당연히 내가 본 영화,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들어본 영화중에 하나를 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름이 어려워서 입에 잘 안붙는다며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하더니 며칠 후 그 때 말한 영화제목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고 했다. 원작이 있는 영화라는데 처음 들어보는 영화였고, 나는 그게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 ㅋㅋㅋㅋㅋㅋㅋ 재작년의 일이다.

 

영화를 봤다. 오호- 일단 믿고 보는 워킹 타이틀. 게다가 좋아하는 배우인 게리 올드먼과 콜린 퍼스, 잘생김을 연기하는 지구 유일의 배우인 베네딕트까지. 근데 영화를 다 보고 뭘 얘기하는지 스토리의 가닥은 알겠는데 뭔가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조지라고 했다가 스마일리라고 했다가. 컨트롤은 또 누구고, 칼라는 뭐며. 나름 어렸을때부터 각종 소설과 비디오로 고유명사에 단련되어 온 나라고 자부하는데 당최 등장인물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게다가 디테일을 놓치는 기분이 든다. 인물들이 자꾸 눈빛을 주고 받는데 저기에 뭔가 의미가 많은 느낌이 있다. 근데 난 그걸 잘 모르겠다.

 

어떻게어떻게 해서 각 등장인물이 체스의 말에 대비되며, 각각이 팅커, 테일러, 솔저로 대응되고 조지 스마일리, 토비 에스터헤이스 등 풀 네임에 좀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뭔가가 빠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도 책도 그들만의 용어로 불친절하게, 그들만의 서술방식으로 회상과 현재가 구분없이 마구 진행되기 때문에 장담하건대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이 영화를 극장개봉으로 봤다면 뭥미- 했을 것이다.

 

 

연말, 드디어 여유가 생겨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영화도 그렇더니 책도 불친절하기가 역대급이다. 등장인물 소개 같은 건 없다. 사건도 연대순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게다가 영화와 소설은 전개방식도 다르고, 디테일도 달라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고 해도 중간까지는 크게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일 년도 전에 본 영화인걸. 그러다가 슬금슬금 영화의 장면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TTSS(Tinker, Tailor, Soldier, Spy)는 존 르 까레(John Le Carre)의 소설이다. 존 르 까레는 영국정보부 MI6에서 실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영국정보부는 MI5와 MI6로 나뉘는데 MI5는 국내, MI6는 국제관계를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다. (MI5를 다룬 영국 드라마로는 Spooks가 있다.우리 나라 같은 경우는 이 둘의 업무를 국정원이 하는 셈이고. 르 까레의 스파이 소설은 스마일리 시리즈, 혹은 카를라 3부작 등 여러편이 있다.

 

영국에서는 아마 애당초 인기있는 작품인듯 드라마로도 방영되었었고, 영화로도 이게 처음이 아니다. 그러니 11년판 TTSS 영화가 국내의 아무런 기초없는 관객들에겐 이게 뭔 소리임? 싶을 수 밖에.

 

제목의 팅커 테일러 어쩌구는 영국의 동요에서 따온 것인데, 책 맨 앞장에는 서술되어 있다. Tinker, Tailor, Soldier, Sailor, Rich man, Poor man, Beggar man, Thief...로 시작되는 동시라고 해야하나 동요라고 해야하나, 꽃잎 떼거나 내 미래의 남편은 누구일까~ 뭐 이렇게 점치듯이 흥얼거리는 노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뭐 이런 노래인 셈인데 차례차례 1. 김수한무, 2. 거북이, 3. 두루미, 4. 삼천갑자, 5. 동방삭 하는 식으로 각각에 넘버링을 해서 난수표처럼 암호화해서 쓰게 된다.

 

일단 시대적 배경은 냉전시대. 무대는 일명 Circus라고 불리는 MI6이다. 이야기의 시작에서는 컨트롤이라고 불리는, 실명은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수장으로 있고, 위치크래프트라고 불리는 작전이 수행중이다. 말은 거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폴리아코프라는 이중간첩을 이용해 러시아에서의 유용한 정보를 빼내고, 영국의 쓸모없는 정보를 주며 거래하는 작전이다. 이 위치크래프트는 당연히 보안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만이 관여되어 있다.

 

그런데 컨트롤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서커스 안에 이중간첩(=Mole=두더지)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년의 컨트롤은 조심스럽게 정보를 모으고 추론을 해서 하나씩 하나씩 지운 뒤 오지선다형 보기를 만들어낸다. 이때쯤 컨트롤은 파워도 잃은 상태고, 육체적으로도 쇠약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컨트롤이 집착과 과대망상에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컨트롤은 믿을만한 사람인 조지 스마일리(=영화에서 게리 올드만)를 찾았으나 그는 그때 베를린 임무 중이었으므로 차선책으로 스캘프헌터(암살 및 회유 전담요원)의 책임자이자 체코 전문요원인 짐 프리도를 불러 임무를 맡긴다.

 

체코 브르노로 가서 정보를 하나 확인하고 오라는 것.(영화에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변경) 서커스안에 썩은 사과가 있는데 그 썩은 사과가 누구인지 가서 알아낸 후에 그걸 나에게 암호명으로 전달해라. 이 임무는 비공식이니 발각되면 영국과의 관계는 부인해라. 라는 것이 짐 프리도에게 맡겨진 임무이고 이 작전명은 엘리스이다. 썩은 사과(=스파이)의 이름을 말하면 정보가 노출될 수 있으니 암호는 이렇게 하자. 내가 추리고 추린 보기는 다음과 같다. 퍼시 올러라인(=토비 존스), 빌 헤이든(=콜린 퍼스), 로이 블랜드(=시아란 힌즈), 토비 이스터헤이스(=다비드 덴칙),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 두더지는 이 다섯명 중에 하나일 것이니 각각의 암호에 팅커 테일러를 대입시킨다. 1. Tinker=퍼시, 2. Tailor=빌, 3. Soldier=로이, 4는 세일러가 올 차례지만 빌 테일러의 테일러를 연상시키므로 빼고, 리치맨을 붙이자니 이미지상 안맞는다(나름의 개그인듯) 그래서 4. Poor man=토비, 5. Beggar man은 스마일리. 니가 확인한 스파이의 암호명에 대응되는 한 단어만 나에게 보내면 된다. 인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떤 이유에서인지 꼬이게 된다. 그 결과 짐 프리도는 오른쪽 등에 총알을 맞고 거구의 곱추가 되며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러시아인들은 무슨 이유인지 그를 고문하고, 그는 겨우 살아남아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모든 것을 잊고 살라는 명령을 받은 후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살게 된다. 한편 스마일리는 베를린에서 돌아와보니 아내는 바람이 나 결국 떠나고, 컨트롤은 죽었고, 영화에서는 죽진 않았으나 죽기 전 괜히 퇴직하면서 스마일리까지 퇴직을 시키고(썩은 사과에서 썩지 않은 사과를 분리하려는 의도), 서커스는 퍼시가 부장을 맡게 되며 빌 헤이든의 런던 스테이션 체제로 돌아가게 된다. 로이 블랜드는 런던 스테이션의 2인자를 맡게 되며 토비는 그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삼각형 모양을 이룬다.

 

죽은 줄 알았던 리키 타르가 몰래 들어와 상급자인 토비 길럼(=영화에서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을 찾게 되고, 리키 타르의 이야기로부터 서커스 내에 로튼 애플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로튼 애플은 KGB인 Karla와 관계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건 컨트롤이 괜히 집착했다거나 편집증이었던 게 아니라 그의 의심이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위로는 내각 조정실 실장인 올리버 레이콘이 서커스의 문제를 찾으려면 서커스로부터 거리가 있는 사람이 적임자라 판단되어 스마일리에게 이 일을 맡긴다. 스마일리는 길럼의 상급자로 서커스의 로튼 애플을 찾게 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이걸 왜 쓰고 있나 싶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나는 원작을 다 읽고 난 후 영화를 다시 봤다. 이 순간을 기다려 일부러 영화를 쟁여놓았었다. 그러고 나니 맙소사. 영화는 엄청난 수작이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야기의 핵심만으로 솜씨좋게 짜여있는데다가 서늘하면서도 긴장이 서린 분위기에 연기 엄청 잘하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눈빛만으로 전달되는 수많은 함의. 게다가 막판은 시대적상황까지 맞물려 묵직하게 슬프다. 누구는 결국 한 편의 치정극인 셈이라고도 하던데. 글쎄. 영화에서는 간단히 넘어가지만 원작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Mole은 냉전을 겪으면서 어느새 주도권에서 밀려나게 된 좁고 작은 섬나라 영국의 상황에 절망한다. 그래서 그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 것인지 숙고하다가 러시아를 선택하고, 그 다음부터는 내적인 갈등없이 Mole로 살게 된다. 물론 그건 Mole의 성향 자체가 야망이 큰 자이며 추구하는 것이 Majority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그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성향을 평생 드러내지 않고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위치크래프트에서 영국은 그저 전화교환수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칼라가 정말 원하는 것은 미국을 주무르는 것이고 미국을 교란시키는 것일뿐.

 

원작에서 조지 스마일리는 작고 뚱뚱하고 느린 홀아비스타일의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고, 반면 빌 헤이든은 빛나는 존재, 서커스의 워너비, 모든 이들의 선망이다. 그리고 컨트롤, 조지 스마일리, 빌 헤이든, 짐 프리도는 모두 옥스퍼드 출신이다. 영화에서는 조지 스마일리를 게리 올드만이 맡아 사색적이면서도 조용하고 신중한 이미지가 부각되었고, 빌 헤이든은 콜린 퍼스가 연기해 그 와중에 매력남이긴 하다. (게리 올드만은 레옹에서 정말 간지 작살인 악역이었는데, 배트맨부터는 어느새 착한 사람 얼굴을 하고 있어;;;;)

 

영화에서 Mole은 총에 맞아 죽는다. 원작에서 Mole은 목이 부러져 죽는다. 영화와는 달리 누구에게인지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그를 사랑했던 그러나 그에게 배신당한 남자에게 죽는다는 것이 충분히 암시되어 있다. 허세넘치는 영웅도 없고, 미녀도 없고, 저게 말이 되긴 하나 싶은 생각도 안들만큼 허황된, 오~~ 감탄하게되는 액션도 전혀 나오지 않는데 여운이 길다. 책은 사방에서 짜기 시작한 무늬가 마지막에 와서야 드러나는 느낌이 있다면 영화는 모든 것이 밝혀지고도 아련하고 씁쓸하게 남는 끝맛이 있다.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영화에서는 각각의 인물을 체스말에 비유해 퍼시를 White Rook, 빌은 White Bishop, 로이는 Black King, 토비는 Black Knight, 스마일리는 Black Queen, 칼라는 White Queen에 대입하고 있다. 앞의 다섯개는 컨트롤이 붙여놓은 것이지만 칼라의 화이트 퀸은 스마일리가 붙인다. 각각의 캐릭터에 맞는 체스 말을 붙였는데(특히 빌을 비숍에 비유한 것) 자신이 블랙 퀸이라면 싸워야 할 진짜 상대는 칼라라는 것을 아는 스마일리의 혜안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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