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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곡성 2016.08.16
  2. 내가 휴가에서 건져올린 것들. 2016.08.16

곡성

나홍진이 감독한 영화는 현재 왓챠 기준으로 다섯편이다. 한, 완벽한 도미요리, 추격자, 황해, 곡성. 이 중에서 한과 추격자를 빼고 세 편을 보았고, 단 세 편에 별점을 매긴것만으로도 나홍진은 내가 선호하는 감독 9위로 집계됐다.

 

곡성은 개봉한 날 바로 보고 싶었지만 무슨 사정인가가 있어 둘째날 봤다. 같이 보려고 했지만 시간을 맞출 수 없어 미룰까 하던 차에 그냥 혼자 심야로 봤다. 그리고 좋았다. 좋았다는 것은 이 영화가 행복하며  나에게 고양되는 기분을 주었고 이 영화가 너무 사랑스럽다- 이런 얘기가 당연히 아니다. 이 영화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허구로 쌓아올린 세계가 마치 진실인듯이 어떤 부분에선가 울림을 주었다는 뜻이다.

 

전에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한적이 있다. (그 친구는 자기가 그런 말을 한것도 까먹었겠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마치 구덩이처럼 불운이 바닥에 깔려있는거 같다고, 그 구덩이는 도처에 있어서 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고. 나홍진은 이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족중 가까운 사람의 불행을 경험하게 되었고, 왜 그것이 그에게 일어났는지 화가 났다고 했다. 이 영화는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영화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떻게 위로하기 위해 만든 영화냐고 분노했지만 나는 그 말이 그냥 와닿았다.

 

천우희는 왜냐고 묻는 곽도원에게, 그것은 딸의 애비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황정민은 그냥 미끼를 던진 것이고 너는 미끼를 덥석 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던진 입장에서는 누가 물었어도 상관없는 거였는데 그냥 니가 미끼를 문 것이라고. 마치 도처에 깔려있는 지뢰처럼. 누구여도 상관없으니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구덩이처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너만큼은 좀 다른 결과가 되길 바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잡아끌어보았던 천우희의 마지막 표정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절망, 또 하나 놓치고 말았다는 회한을 그 찰나의 순간 보여주었고, 이 영화는 천우희의 그 표정으로 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홍진이 피해자를 위로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나냐고 생각하다가, 내가 좀 더 잘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불행이라고 생각하다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다가. 자책과 후회와 절망이 범벅이 되어 발목을 잡아끄는 늪 같은 상태에 있을 살아남은 자들에게, 아니라고. 니가 어떻게 행동했건 별 변수가 되지 못했을, 그건 그냥 지뢰같은 것이었다고. 그러니까 자책도 후회도 내려놓으라고.

 

물론 이 영화가 영화 자체로 보여주는 것은, 끝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갈림길의 입구에서 제한된 정보와 끝없는 의심만을 가지고 선택해야 하는 인간의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한없는 무력감이었지만. 그래서 이 영화는 나에게는 슬픈 영화였다. 그리고 진짜 무서운 영화는 슬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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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휴가에서 건져올린 것들.

이번 여름 휴가의 키워드를 뽑아보자면, 물론 아직 휴가가 끝나진 않았지만-집 앞 탐앤탐스, 한국사, 다이어트, 요리. 이렇게 4가지가 되겠다. 지난 겨울휴가에 유럽여행을 다녀와서인지 모두들 이번 여름엔 어디 안가냐, 혹은 어디 가냐가 인사였다. 왜, 대체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의 휴가=여행이 되었나 하고 약간 시니컬한 마음이 드는 주제에 나조차도 누군가가 휴가라고 하면 어디 가세요? 어디 안가세요? 하고 묻는걸 보면 이건 그냥 식사하셨어요? 안녕하세요~와 비슷한 인사말이 된 모양이다. 몇 년 전부터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은(혹은 그럴 필요 없는) 질문에는 말도 안되는 개그나 드립으로 받아치고 있기 때문에 누가 여행 안가냐, 왜 안가냐라고 물어보면 "가난뱅이라서요" "돈이나 좀 주고 그러시든가요" 뭐 이런 태도로 대답해왔는데 슬프지만 이건 드립이 아니다. 과거 누군가 했던 말처럼 정말 농담은 언제나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도. 내년에 큰 돈을 쓸 계획이 있기 때문에 여행 지출은 당분간 동결해놓을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여행을 꼭 가야 한다. 가고 싶다-이런 생각을 원래 안한다. 막상 가면 누구보다 신나게 다니고 얘 뭐야 싶을 정도로 즐기지만 출발 과정을 즐기는 타입은 아닌거지.

 

이번 휴가의 목표 두 가지는 다이어트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었는데 막상 휴가가 되고 나니 내 소중한, 이 피같은 시간을 공부에 쓰기는 너무 싫어서 탱자탱자 놀았다. 개버릇 남주냐, 아니 지버릇 개주냐인가? 아무튼 최소 시간을 들여 최대 효율을 뽑으려는 게으른 생활방식으로 당연하게 몇 년 살다보니 이번에도 일단 놀고 나중에 공부한다- 자세로 놀고 놀고 또 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시험이 일주일 남았네? 에이 이렇게 된거 월요일에 환불; 하려고 들어가보니 50% 환불인거다. 에이 망했네. 어차피 50%인거 귀찮아라, 내일 환불해야지 했더니 화요일부터는 환불이 안되는거다 -_- 레알 망했네. 어이쿠 이젠 걍 쏟아부어서 공부해야지 하고 퇴근하고 화.수.목.금 4일을 집 앞 탐앤탐스에 가서 미친듯이 공부를 했다. 일단 책은 한 번 다 읽고 기출은 좀 풀어봐야하지 않겠나 싶어서 풀파워로 집중해서 읽고 수험생의 자세로 문제 하나하나를 씹어먹을 듯이 풀어가며 머리속에 쑤셔넣어봤으나 한국사 고급은 나처럼 오랜만에 공부하는 애가 4일만에 볼 수 있는 시험은 아니었다. ㅋㅋㅋ 아 솔직히 내심 한 구석으로는 기대했는데. 책 한 번 집중해서 보고 나면 어떻게 1급 커트라인은 넘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건방지게 ㅋ 이 시험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수험생들에게 미안한 소리지. 게다가 시험 전전날 치아재교정에 들어가 치아가 이동하느라 아파 이틀동안 밤에 잠을 못잤고, 시험은 당연히 어려웠는데, 그 와중에 오랜만에 한 공부는 너무 재밌더라. 어이없게도. 뭐에 오랜만에 열중해서 그런가? 이틀만 더 공부했으면 싶을 정도로. 그래서 다음 시험도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책을 열심히 읽기보다는 기출을 분석해서 요령껏 외우면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걸 알겠는데, 내가 시험점수와 자격증으로 뭐 써먹을려고 시험보는게 아니다보니 정말로 공부를 재밌게 깊이하고 머리속에 쭉 꿰어진 인과관계의 흐름과 역사에 대한 이해로, 진짜 다 알아서 시험을 잘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100점 받았네, 99점 받았네 하는 글들을 보니 나도 시험 이후에도 휘발되지 않는 단단한 내 실력으로 100점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진작 들었으면 좋았을텐데 ㅎ

 

다이어트는 현재로서는 잘 되고 있다. 워낙 시작점이 맥시멈을 찍기도 했거니와, 이번엔 정말 열심히 하고 있기도 하다. 마침 시작하던 때가 주기를 맞춰서 흐름을 잘 탔기도 하고. 가끔은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없는건 아닌데, 목표가 분명해서 그런가. 대충 하다가 적당히 만족해버린 몇 번의 다이어트와는 달리 이번엔 꽤나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오늘부로 -5.5kg를 찍었고, 처음 목표까지는 6.6kg 남았다. 사실 여기서 2kg 정도만 더 빼면 모두가 다이어트 안해도 되지 않냐? 소리를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 남 보기 좋으라고 살을 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장 편하게 지내던 체중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라서 올해는 저기 도달하고 유지해서 평생체중으로 삼으려고 한다. 다이어트 할때마다 느끼는 건데 당연히 체중감량의 바이블은 식이90%+운동10%라는 것. 두번째는 내가 근 10년동안 얼마나 개떡같은 식생활을 해왔는가 하는 것이다. 그 전 10년 동안은,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다 죽어도 넌 흡혈귀처럼 탱탱하게 살고 있을거야'- 라고 말할 정도로 몸에 나쁜 짓 몸에 나쁜 것은 안먹고 살았던 거 같은데. 평생 안 먹던 디저트, 초콜렛 같은 단 것들도 자주 먹고. 밤늦게 떡볶이 먹고. 뭐 어쩌겠나. 몸은 정직하니 시간을 들여 걷어내야지.

 

그래서 슬슬 시작해야지... 하던 요리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지금 내 생활은 필요없는 물건을 줄이고 버리고 필요한 물건 중 정말 필수적이고 급한 것만 구입하기-체제로 돌입한지 3년쯤 됐는데 요리를 하다보니 별 수 없이 몇 가지 살림살이를 줄줄이 들이고 있는 중이다. 아 할 수 없지. 움직일 때 좀 짐이 되겠지만 감수하는 수 밖에. 그렇지 않으면 식생활에서 자꾸 타협을 봐야 하니까. 근데 이것도 하다보니 좀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속에 떠오른 메뉴를 만들려고 참고하는게 아무래도 인터넷인데 만들고 나면 뭔가 아쉽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인터넷에 있는 레서피들은 요즘 인터넷의 정보가 대부분 그렇듯이 야매랄까. 혹은 백종원의 2쇄 3쇄 4쇄랄까. 혀에 닿는 맛만을 내기 위해 뿌리고 칠하고 흉내낸 느낌이 든다. 그게 나쁜건 아닌데, 내가 지향하는 바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이 구체적으로 든 것은,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은, 여행기부터 마무리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싫어 블로그를 팽개쳐두다가, 글 쓰기는 귀찮으니 글을 읽고 싶다가 아니라 지금 당장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리고 좀 요리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떤 사람의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블로그를 읽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몇 가지의 부글부글 끓고 있던, 마그마같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근 2년정도 동안 느껴온 감정이 슬럼프가 아니라 '권태'라는 것도 순간 뚜렷해졌고. 오랜만에 무언가 하고 싶고, 누군가를 샅샅이 읽어내고 싶다는 느낌이 든 것도 오랜만이다. 요즘 왜 이렇게 모든 사람과 모든 주제와 모든 것이 하나같이 시시껄렁하게 느껴지는가라는(사실은 내가 시시껄렁하기 때문이겠지) 진흙같은 감정속에 파묻혀 있다가 저 멀리서 반짝- 하고 빛나는 별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건 저 별을 갖고 싶다라거나 저 별에 가고 싶다라거나 그런게 아니라 아. 역시. 어쩔 수 없이 캄캄한 밤하늘인줄 알고 포기했었는데 달도 있고 별도 있었어. 없는게 아니었어. 내가 어두운 쪽을 보고 있던 거였어-를 확인한 그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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