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생활. 이사카 고타로 몇 권

이사카 고타로의 《화이트래빗》을 읽고 매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도서관 세 군데에서 이사카 고타로만 왕창 빌려놓고 읽었다. 일본 작가들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오쿠다 히데오 처럼 이사카 고타로도 「이사카 월드」같은 느낌이 있다. 읽어본 결론으로는, 재치있으나 끝까지 읽으려면 인내심과 지구력이 필요한 작품도 있고, 아.....이건 좀 아니지 싶은 것도 있고, 킥킥거리면서 보게 되는 것도 있고 그랬다.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책이 몇 권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나무위키인지 위키백과인지를 통해 본 결과로는 27권인듯. 그리고 그 중에 여덟 권을 읽었다. 다 읽을 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30% 정도 읽은 셈. 슬슬 뭐가 뭐였는지 까먹을 때가 됐단 얘기다. 그러니 한 번 중간 정리를 해놓고 넘어가기로.



첫번째. 러시 라이프. 2002년 작


내가 읽은 버전은 이 표지가 아니고 에셔의 그림이었는데 그 표지가 좀 더 낫지 않나 싶다. 수많은 병정들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올라가고 있는, 그리고 한 구석에 보면 그들이 그런 빙구짓을 하는 것을 올려다보는 듯한 병정 하나가 있는 그림. 


다섯 가지 이야기가 알고 보면 연결되어 있는 건데 이사카 고타로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이사카 월드」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앞으로 이런 특징을 「이사카 월드」라고 말하겠다. 


《화이트래빗》에서 마음에 들었던 등장인물 구로사와가 에피소드 중 하나에 등장한다. 본격적으로는 아니고. 재미정도로 보자면 SOSO. 중간 정도인 것 같다. 엄청 재밌지도 그렇다고 시간 아깝지도 않은. 다만 나는《화이트래빗》을 읽고 기대치가 한껏 올라가있는 상태에서 읽은 거라 다소 실망했다.


하긴, 《화이트래빗》을 이야기할 때 내가 눈빛이 마구 반짝거렸다며 따라 읽은 직장 동료는 《화이트래빗》에 다소 실망했다고 했다 ㅋㅋㅋ 내가 그 소위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옛날부터 여러 명 낚았지 ㅋㅋㅋ



두번째. 사막. 2005년 작


아. 이거 되게 재미없다. 내가 진짜 되게라는 말 안 좋아해서 매우, 엄청, 진짜, 정말- 웬만하면 이런 말로 바꿔쓰는데 이건 정말 되게 재미없다. 내가 성장소설, 청춘소설, 이런 걸 안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런 시시한 소설은 정말 읽기 싫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게 있는데 다자키 쓰쿠루를 빼고는 등장인물들 모두의 이름에 색채가 들어간다. 뭐 아오이라든가, 그런식으로. 청, 홍, 백, 흑 이런게 들어가고 다자키만 그게 없어서 마치 얘만 정체성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얘만 한정되지 않은. 어찌보면 좀 뻔한 그런 건데, 마찬가지라고 해야 하나. 이 사막에 나오는 애들은 이름에 모두 방위가 들어간다.  


북-기타무라, 동-도도, 남-미나미, 나머지 둘은 서와 중앙인가? 한 명은 초능력도 있고, 사차원 또라이도 있고, 초미녀도 있고 뭐 그런 애들의 대학시절 이야기인데 여튼 취향에도 안맞고 재미도 없다. 지금 표지를 보니 이게 나오키상 후보작이었네. -_-



세번째. 종말의 바보. 2006년 작


가장 최근, 어제 끝낸 책. 진도는 엄청 안나갔는데 그렇다고 재미없냐면 그렇지는 않다. 재미는 없지 않은데 술술 읽히는 책도 아니었다. 이 출판사가 표지를 좀 귀엽게 뽑기도 하고, 제목도 종말의 바보-이다보니 유쾌하고 큐트해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런 내용은 아니고,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오는 중이라 지구의 운명은 3년 시한부 선고를 받은 시점에서 각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역시 옴니버스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여덟 개의 에피소드로 되어있는데 몇 개는 굉장히 와닿는 것들이 있다. 무언가 강력한 계기가 있을때 사람은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먼지만큼의 무게도 없다는, 한없이 덧없음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그냥 늘 곁에 있을 것 같아 소중함을 몰랐던 것의 가치를 알게 되기도 하잖은가. 특히 가족에 대해서 그렇고.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는 다섯번째 강철의 울. 슬램덩크스러운 킥복싱 선수와 관장, 그리고 그를 동경하는 초딩이 나온다. 세상이 내일 멸망하더라도 나는 로 킥과 레프트 훅을 날린다-는 자세로 연습을 하는 킥복싱 선수가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 중 가장 좋았다. 나도 그 초딩처럼 이런 면을 동경하는 성격이다. 


 

네번째. 사신의 7일. 2006년 작


《사신 치바》의 후속편 격인것 같은데 나는 이걸 먼저 읽었다. 그래서 《사신 치바》를 읽을 거냐면 읽을 거다. 캐릭터는 매력있다. 약간 드라마 도깨비의 저승이들이 이런 느낌인 것 같은데. 물론 치바는 인간적인 면이나 인간들의 이승 라이프에 감화되어 감정이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본의아니게 허당끼도 있고 개그캐릭터이기도 하다. 음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이 또하나의 특징인데 음악을 느끼거나 감상하거나 하는게 아니라 그냥 음악이 들리기만 하면 장르도 구분없이 신나하는 듯. 좀... 개같은 면이 있다;;; (욕 아님)


처음에 표지판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건 저승이 망자를 데려오는 법칙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면서 마치 2성부로 진행되는 푸가같기도 하고 그렇다. 


구글링해보니 이사카 고타로의 캐릭터중에서 인기투표 1위했단다. 치바가. 참 내, 인간들의 취향이란.



다섯번째. 남은 날은 전부 휴가. 2012년 작


난 이거 재밌었다. 약간 병맛 일드 보는 느낌이라 거슬리긴 했는데, 왜 일드보다 보면 여주인공이 헤에?~ 야다~ 이러고, 두피를 빗으로 두드리며 팔에 토시 낀, 머리 숱 없는 부장같이 생긴 사람이 우소- 다메다메 막 이러는 게 내용의 반을 차지하는 일드;;;; 그런 거 딱 싫어하는 취향이라;;; 실제로 이 책의 내용이 그런 게 반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성실하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며 전진한다. 근데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읽다보면 영상지원되는 느낌이 있다.


역시 몇 개의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동안 그 등장인물들이 약한 연결고리로 이어져있는 걸 깨닫게 되는「이사카 월드」스러운 소설이다. 오카다와 미조구치라는 콤비가 나오는데 뒷골목 해결사 같은 사람들이고 오카다는 이제 그만 이 일을 정리하려고 한다. 표지에 부유하고 있는 남자가 오카다겠지. 이제 이 일을 정리하고 내 인생은 숙제없는 여름방학이야- 라고 하지만 얘를 과연 조직이 순순히 보내주겠냔 말이지. 오지라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오카다는 좀 마음에 들었다.



여섯번째.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2014년 작


역시나「이사카 월드」스러운 스토리. 근데 이건 애초에 이렇게 쓴 건 아니고 각각의 작품을 엮었는데 엮인 거라고 한다. 신기하네.


목 부러뜨리는 남자는 섬찟한데 약간 4차원 또라이같은 면이 있어서 이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될지 혼란스러워하면서 읽게 된다. 구로사와도 잠깐 등장한다. 구로사와는 본업은 빈집털이고 부업은 탐정으로, 여기서는 첫사랑을 찾는 부인의 뒷조사를 한다. 그 부인이 50년동안이나 겨우 그 여덟시간을 못잊어서 이러는 자기가 어리석어보이지 않냐고 묻자 이런 말을 한다. 

"아니. 옛날에 본 육상 선수 칼 루이스의 100미터 달리기는 거의 10초밖에 안 됐지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해. 추억은 시간하고는 별 상관 없어." 내가 이래서 구로사와를 좋아합니다. ㅋ


그럭저럭, 모든 에피소드가 다 읽을만하고 다 재밌다. 하지만 엄청 좋은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읽을만.



일곱번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2014년 작


제목이 너무나 어울리는 책. 어느 작은 밤의 음악이라는 예쁜 제목답게 소소하고 재밌다. 처음에는 모차르트의 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를 틀어놓고 읽었는데 사실 그 음악은 별로 안어울리고 차라리 현악사중주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것도 역시 「이사카 월드」스러운 책인데 다른 것들과는 조금 다르게, 러브 액츄얼리 같은 느낌이 있다는 것이 차이점.


이사카 고타로는 음악을 엄청 좋아하는 모양이다. 또 하루키랑 비교해서 안됐지만, 하루키가 약간 음악을 욱여넣는 느낌이 있다면- 1Q84에서 뜬금없이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야나첵의 신포니에타라거나, 다자키 쓰쿠루는 리스트 순례의 해를 PPL 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고, 기사단장 죽이기는 아예 돈조반니. 근데 이게 좀 심하다 싶은데 이사카 고타로는 그것에 비해서는 훨씬 녹아든 혹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느낌이 있다. 


그래서 이사카 고타로는 이 연애, 사랑에 대해 뭐라고 하냐면, 그때는 뭔지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아. 그거였네. 하고. 그때 당시의 그 순간에 느끼는 게 아니라 지나고 나서야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게 좋은 거란다. 그때 거기에 그 사람이 있었어서, 거기에 있었던 게 그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좋은거라고.



이 중에서 두 권을 고르라면 《남은 날은 전부 휴가》,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