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02 파리, 개선문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었다. 정말 아침 안 먹고 산 지가 이십 년이 넘는데, 전날 저녁 완전히 속을 비운 상태로 자기도 했고, 오늘 엄청 다닐 예정이기 때문에 든든히 먹어놔야겠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먹었다.

 

라디에이터는 막상 활용해보니 마법같은 존재라, 스타킹이나 레깅스를 얹어놓으면 아침에 정말 뽀송뽀송하게 말라있었다. 난방효과보다 빨래말리는 용도로 더 좋았던 듯.

 

 

이 날은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가 계획이라고도 하기 민망한 대략의 일정. 할 수 있다면 쇼핑도 할 생각. 지하철은 샤를 드골 에뚜왈(Charles de Gaulle Etoile) 역에서 내리면 된다. 이 때만 해도 밤에 여기를 또 올 줄은 몰랐지. ㅎ 날씨는 비만 안 오면 만족. 샹젤리제를 먼저 갈까 생각도 했었는데 개선문 입장을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전망대까지 가려면 지하에서 표를 사서 올라가야 하는데, 약간 헛갈리게 되어 있다. 문만 보고 싶다면 그냥 지하철 출구로 나가서 밖에서 보는 걸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올라가고 싶다! 올라가서 파리를 내려다보자. 신나서 올라감.

 

 

흉내낸 짝퉁들만 보다가 진짜를 보니 생각보다 완전 크다. 세상의 온갖 문들이 이 문을 흉내냈잖아. 그런데 이건 비할 바가 아니구나. 사진으로 보면 작아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더 크게 느껴진다.

 

 

벽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부조도 많지만 저런 걸 땡겨서 찍고 싶진 않고 그냥 눈으로 보면서 계속 사람들을 따라 간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사진을 안찍었을 것 같지 않은데 없다. 하드 날라갈때 같이 날라갔나보다. 빙빙도는 나선형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이때쯤에 나의 소박한 행운에 매우 감사하게 된다. 내가 출국전에 캐리어 속에 넣어둔 얇은 회색 코트로 갈아입을까 고민했으나 결국 갈아입지 않은 것에, 키높이역할을 할 워커로 갈아신지 않은 것에. 갖고 있는 코트 중 가장 따뜻한 코트를 입고 온 것에. 발에 가장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ㅎ

 

다음에 파리에 가면 또 한 번 개선문에 올라가야지.

 

 

중간에 한 두 번 정도 넓은 곳이 나오고 힘을 내서 더 올라가면 이렇게 파리 시내를 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펼쳐진다. 와오. 진짜 이 기분은. 그냥 360도를 다 돌아도 파리가 보인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쭉쭉 뻗은 일직선의 길이 방사형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저 개선문이 있는 광장의 이름이 샤를 드 골 에뚜알. 지하철 역은 그 이름을 땄다. 시계처럼 12개의 대로가 나 있다.

 

 

에펠탑도 보인다. 오? 여기서 보니까 엄청 가까워 보인다. 호텔까지 걸어가도 되겠는데? ㅋㅋㅋㅋ 농담처럼 말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린 유럽 여행 동안 정말 말도 안되게 걸어다닌다.

 

 

날씨가 흐린 것이 아쉽다. 여기서 보는 야경이 그렇게 끝내준다는데 야경을 볼 것이냐, 밝을 때 올라가서 볼 것이냐 고민했었지만 잘 한 것 같다. 야경은 다음 기회에. 다음에 또 오고 싶도록 아쉬움을 남기자. 위에서 뻥 안 치고 셀카 100장 찍었다. 혼자 찍고, 같이 찍고, 셀카봉으로 찍고. 머리는 온통 날리고 얼굴에 들러붙고, 그래도 좋다고 웃으면서 여기서 찍고 저기서 찍고. 손에 에펠탑 올려놓고 찍고. 나 혼자였으면 이렇게 열심히 셀카 많이 안 찍었을거 같은데 E랑 있으니까 내 기준에선 원없이 찍었다. 찍을땐 안 해 본 짓 하려니 이상했지만 결국 남는 건 사진과 그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안 그랬으면 온통 나 없는 배경사진들만 잔뜩 있었을지도.

 

 

이건 눈으로 내려본 게 아니라, 내려오는 도중에 어느 층엔가 개선문에 대한 박물관처럼 축소모형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광장을 찍는 카메라가 설치 되어 있어서 아래 상황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화질이 너무 좋고 신기해서 찍은 것.

 

공식 기념품 샵도 있는데, 뭐랄까. 난 그런 걸 잘 안사게 되더라. 눈으로 직접 본 오리지널들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는 것조차 너무 멋있는데 그걸 평면으로, 혹은 디자인 모티브로 재현해 놓은 레플리카들은 색도 너무 번쩍거리고, 튀고 조잡해보여 손이 안 가는 것 같다. 가기전만 해도 조카에게 팝업북을 사다 주겠다거나 내가 간직할 만한 매우매우 괜찮은 기념품 하나, 친한 사람들 줄 만한 작고 퀄리티 좋은 무언가를 사겠다는 생각을 잔뜩 했었지만 어느 곳을 가서 무엇을 보아도 오리지널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마음을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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