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315. 서울시향 명협주곡 시리즈 I





횡단보도 왔다갔다 하면서 찰칵-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코딱지만큼도 잡아내지 못한 사진이로군. 다음에는 콘서트홀 사진을 한번 찍어야겠다. 

이 날의 주 레퍼토리는 엘가의 첼로협주곡이었는데, 사실 난 이 곡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평소에 프로그램을 보고 공연을 고르는 것과는 달리 이 날의 공연은 그냥 공연 그 자체가 가고 싶어서 간 셈이다. 예습용 파일을 아이팟에 넣어두긴 했지만 지난 공연 이후 내내 모차르트에 빠져 있었고, 특히 K.448만 듣고 듣고 또 들어서 막상 이날 공연 프로그램은 두 세 번 들었을 뿐이었다. 미리 듣고 익숙해져서 듣는 공연은 분명 다르지만 그렇다고 음악까지 숙제하듯이, 공부하듯이 하고 싶진 않아서 걍 설익은 상태로 듣기로 했다.

첫 곡은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었다.
Debussy, Prelude a "L'apres midi d'une faune"

와우. 난 이 곡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예전엔 정말 몰랐다. 아니 그렇기는 커녕 지루하고 졸린 곡이었지. 공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음을 들을때 각각의 색깔을 보기도 한다던데, 그걸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으니.... 소리에서 바람이 느껴졌다. 헛; 내가 써놓고도 뻥같애;;  '마치 바람같은 기분, 바람이 부는 듯한..' 이런 게 아니라 정말 무대쪽으로부터 살랑대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막 자란 풀들이 나부끼고, 저 멀리서 아늑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한동안 누워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끄응- ... 이건 비유법으로 말하면 점점 설득력만 떨어진다. 그 섬세한, 반복적인 움직임들이 내는 소리는 분명 바람이었다.

관객석이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자체로 모든 연주회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다.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소음을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많은 사람들의 침묵이 겹쳐지는 짧은 순간, 객석은 완벽한 고요. 세상의 어디에서 어느 누가 이렇게 집단적으로 남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겠다고 앉아서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까.

엘가의 첼로협주곡은 실연으로 들어도 내 취향이 아니었고, 만프레드는 번스타인처럼 '쓰레기'라고는 못해도 차이코프스키 작품 중에서는 별로라고 생각한다. 전개가 뜬금없고, 차이코프스키 꺼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거지, 몰랐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덜 들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하기에는 온갖 패시지를 걍 끼워맞춰놓은 것 같아 당분간 듣고 싶지 않으니 먼 미래에 유예해놓아야겠다. 모르지, 언젠가는 또 이 생각이 완전히 바뀔지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 너무 좋아서 나는 내내 마음이 뛰었다. 그 아스라이 사라질 듯 지나가는 바람같은 소리. 결국 공간 어딘가로 흩어져 사라져버린 그 소리들이 잠깐 머물러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연주회에 다녀와서 바로 썼으면 좀 더 생생한 기분으로 뭔가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벌써 열흘이나 지나버렸네. 내일은 개교기념일이다. 버뜨, 우리는 관악산 등반을 한다. 젠장. 불쌍(?)한 학생들 하루라도 쉬게 해주면 덧나냐. 후딱 올라갔다 내려와서 집으로 도망와야지. 아...이젠 자야겠다. 내가 이렇게 일찍일찍 자는 애가 아닌데 요즘은 12시에 잠을 자도 7시에 잘 못일어난다. 그나마의 저질체력마저 고갈됐나. 잠자면서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드뷔시의 음악이나 상상하면서- 따뜻한 바람 부는 들판에서 낮잠을 자야지. 사실은 밤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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