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8. 화이트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러니까, 맙소사. 벌써 10년쯤 전이네. 정말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학교도서관에서 '용의자 X의 헌신'을 뽑아서 읽었다가 바로 그 대목에서 헐? 헐! 헐?!!!!!!!!!!!!! 하고 감탄했었다. 그 이후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눈에 띄는 대로 거의 다 읽었었지. 물론 용의자X는 반전의 대표격인 소설이라. 이후 읽은 책들에서 그걸 뛰어넘는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지만, 소소한 재미는 꽤 있었다.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에 나오는 고스케 형사라거나, 용의자X와 갈릴레오 시리즈에도 나오는 유가와 교수처럼 애정을 가지게 되는 주인공들도 있고. 하지만 대부분은 작가가 너무 쉽게 등장인물을 죽이고, 뜬금포 교훈을 던지는 식의 이야기가 많아서 그냥 그냥 관성으로, 의리로 읽게 되는 책이 대부분이었다. 거기다가 어마어마한 다작이라 몇 년쯤 지나고 나니 내가 이걸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도 안나서 다시 읽다가 중간쯤 가서야 윽, 이거 읽은 거네... 한 적도 두세 권 쯤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나의 취향은, 뭔가 탐정스러운, 작가의 페르소나 같은, 아이코닉한 인물을 좋아한다는 것. 엘큘 포와르나,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이나, 주인공이 내세우는 시리즈 인물을 좋아한다. 그리고 너무 진지한 작품보다는 적당히 유머와 여유가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물론 진지하고 묵직한 작품도 좋지. 하지만 그런 건 1년에 한 두세편이면 된다. 독서가 취미이자 생활인데 매번 너무 헤비한 작품을 읽어서는 나도 일상생활이 곤란하다.


그런데! 그런 작가를! 또 만난 것 같다. 사실 모른다. 이 작가의 작품은 몇 개 '알고'는 있었지만 읽은 건 처음이라. 근데 느낌이 왔다. 오- 이 사람은 파볼만한 가치가 있겠어.


이 책에는 레 미제라블과 흰토끼가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 두 이야기를 살짝씩 섞어 변주하면서 마치 전래동화처럼, 예를 들면 호랑이한테 잡힌 나그네를, 토끼가 혹은 여우가 꾀를 내어, 호랑이에게 유리한 걸 제시하는 것처럼 하면서 나그네도 구출하고 자기도 적당히 살고. 그 과정에서 호랑이는 응징하고. 아니면 나그네는 가던 길 가고. 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된다. 게다가 작가가 중간에 불쑥 불쑥 등장해 마치 변사처럼 독자한테 이야기를 던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주인공 구로사와가 매우 매력적이다. 구로사와가 툭툭 던지는 말이, 그 말이 만들어내는 상황이 재밌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깝다. 물론 모른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 이 등장인물이 시리즈로 등장할지 어쩔지, 다른 작품도 이처럼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 어쨌든 이 작품은 재밌어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흥미가 생겼다. 부디 다른 것도 재밌기를.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구로사와를 재활용했기를.


첫 느낌은 이거 영화를 염두에 두고 썼구만. 혹은 자기 작품이 영화화된 전력이 많구만- 간혹 소설 중에 그런 것들이 있다. 씬Scene처럼 읽히는 소설들이. 여기서 장면이 바뀌겠군, 아 여기서 과거회상이군, 카메라가 이렇게 움직여서 여기를 클로즈업 하겠군 하는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소설들.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변사의 활용이다. 다음이 궁금한 거 아는데 잠깐 기다리라고. 이 타이밍에서 저쪽 사정도 좀 보고 오자는 둥, 잠깐 과거 이야기로 가자는 둥. 변사(사실을 작가)가 장면전환의 역할을 한다. 반대로 어떤 점에서 그런 느낌을 주는 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를 소설처럼 찍는 감독들도 있는 모양이다. 소설가이자 전직 장관인 모 감독(이렇게 말하면 누가 몰라 ㅋㅋ)의 최근작 영화가 바로 그 이유로 재미없었단 사람이 있더라. 영화에는 영화만의 이야기 방식이 있는데 그 감독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영화를 찍더라. 그래서 자기는 너무 그 영화가 구렸다- 뭐 이렇게. 


다시 이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이 책을 신나게 읽다가 거의 다 읽었을 무렵, 1/4 가량이 남았을까 싶을 즈음,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감이 좋은 독자는 사건의 흐름, 흰토끼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지도 모르지만," 정확히 이 부분에서, 책장을 돌려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딱히 감이 좋지 않아도 여기까지 읽으니 사건의 전모를 나 역시 다 파악할 수 있었으나, 오! 재밌어! 재밌어서 다시 읽고 싶어- 해서 다시 읽었다. 


작가의 말이나 역자의 말처럼, 읽다가 벌떡 일어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여기까지면 어지간히 했겠지- 하다가 뒷부분에서 어이쿠 ㅋ 역시나 그냥 넘어가지를 않네 ㅋ 하는 만족감이 있었다.


덧. 당연히 영화화 되었겠지-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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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02.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왜 이게 베스트셀러인가. 이해할 수 없다. 장르소설 발달한 일본에서 굳이? 이런 설정은 꽤 많지 않은가. <죽여 마땅한 사람들>도 이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고, 히가시노 게이고 책 중에도 두어 권은 그럴 듯. 읽는 도중에 예상 가능했고, 절반 이상은 맞았다. 


누군가 한 표현 중에 좋은 게 있다. "게으른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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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미야베 미유키

읽은 책인데 또 읽었다. 1/10쯤 읽었을 때 아.. 이거 읽은거다 하고 깨달았고, 그런데 무슨 내용이었더라? 에이 어차피 모르는데 또 읽자.. 하고 읽었고 1/3쯤 되니 슬슬 기억이 나기 시작했는데 사건의 중요한 부분에서는 처음 읽을때 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사건의 진상에 대한 착각)을 했고, 거의 끝부분에 다 가서야 아. 맞다. 이거였지. 하고 기억났다.

 

며칠 전에 읽었던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거였다. 일명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 1권이다. 이때만 해도 사부로도, 사부로의 장인도 캐릭터가 그렇게 뚜렷한 느낌은 아니었던 대신에 사부로의 부인인 나호코의 이미지는 뭔가 뚜렷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착한 사람인것 같지만 무언가가 날카로운 불안함이 공존하는 기분.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는 어디 하나 마음 둘 데가 없다. 사부로도, 장인도, 나호코도, 그리고 자매도, 언니의 남자친구도, 결정적인 범인도. 누구 하나 괜찮은 캐릭터가 없다. 그럼에도 사부로는 나와 달리 그 모든 사람들을 관조하듯이 바라보고 마치 관용과도 같은 태도를 취한다. 장인도 산전수전 다 겪어서인지 그렇게 놀라지 않는다. 두 사람 다 내가 그걸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냐. 좋아한다는 것도 아냐.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마치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은 거리감을 두고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거두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서도 분명 이랬을텐데 두 번째 읽고도 입맛에 씁씁하고 찝찝한 기분이 남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부로의 엄마가 한 두 마디 말이 관통한다. 독설이라고 하지만 핵심인 것이다.

1. "사내와 계집은 말이야. 붙어 있다 보면 품성까지 닮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사귀는 상대를 잘 골라야만 해."

2. "인간이란 누구나 상대가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하는 주둥이를 갖고 있지. 아무리 바보라도 듣기 싫은 소리는 아주 정확하게 한다니까."

 

그리고 그 독설 아래 자란 사부로는 강하고 유연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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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 2권은 <이름없는 독>이란다. 그것도 읽은 것 같다. 이건 꽤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 조금만 훑어보면 기억이 날 듯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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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이름없는 독>은 2008년에 읽었군. 그쯤 되면 기억 안 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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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소년탐정단-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 책은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도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또 읽다가 얼마 지난후에야 아... 이거 읽은거다. 에이 어차피 기억 안나는데 또 읽지 뭐. 이러는 경우도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일단 죽이고 시작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등장인물이 죽는 것은 요리로 치면 아뮤즈부쉐 같은 것이다. 게다가 잘나가는 레스토랑이므로 아, 거기. 거기 정도면 분위기도 괜찮고 가격도 합리적이고, 맛도 나쁘지 않아. 쉐프가 안정적으로 요리를 내는 편이지. 맨 처음에 갔을 때는 정말 너무 맛있어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는데 두번째부터는 그정도는 아냐. 그래도 그 정도면 좋은 레스토랑이지. 의 느낌.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었을때 헐! 하고 이 작가는 뭐지!!!!! 한 이후로 그렇게 딱히 먹고 싶은 거 없을 때 약간의 관성을 담아 선택하는 밥집이 되어버렸다. 

 

오사카 소년탐정단은 가볍게 키득거리며 읽을 수 있는 정도인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쪽에 재능이 있는것 같다. 뭐랄까, 블랙코미디 같은거라고 해야하나 픽- 하고 썩소를 짓게 한다고 해야하나.

 

주인공인 시노부는 초등교사다. 평범한 초등교사(물론 평범하지 않지만)주변에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어나가는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주변 인물들과 학생들부터가 히가시노 게이고 월드의 주인공들이다. 김전일 같은 녀석들.

 

갈릴레오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유가와 교수처럼 시노부도 확실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건 미스터리 작가들의 로망인것 같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르나, 미스 마플이나, 브라운 신부같은 자기만의 탐정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 미야베 미유키도 전엔 그런 경향이 없었는데 에도 시리즈와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를 보면 슬슬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작가로서의 성숙기 같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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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미야베 미유키

 

예전에 블로그인에서 블로그할때는 책 읽을때마다 뭔가를 썼는데, 그럴때마다 책 표지도 새삼스럽게 보게 되고, 그 책이 무슨 내용인지, 하다 못해 내가 뭘 느꼈는지, 인상깊은 구절은 무엇인지를 나중에라도 되새길 수 있었다. 요즘은 내가 이 책을 읽었는지, 무슨 내용인지, 당최 기억이 안난다. 특히 미스터리를 많이 읽다보니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책들은 더더욱 잘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책을 사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이거나 만화책은 산다. 그리고 읽은 후에 중고서점에 팔아버린다. 책을 갖고 있기가 싫어졌다. 그러다보니 집에 남은 몇 권의 책은 중고서점에서 받아주지 않을 책들만 남아버렸다. 누군가 서재를 보고 나라는 사람을 판단한다면 책 따위는 읽지 않는 사람이거나, 이상하고 오래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겠지. 그나마도 조만간 정리해버릴 것 같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다보니 원래 표지가 이렇게 생긴지도 몰랐다. 도서관에서는 겉표지와 띠지를 버리니까. 다시 생각하지만 책을 읽고 이렇게 책 사진을 찾아보고, 뭐라도 좀 쓰는건 나를 위해 좋은 것 같다.  

 

예전에 책과 사람 사이에는 '인연'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애틋하고 로맨틱한 의미 혹은 오컬트스러운 인연이 아니라 어떤 책에서 와닿는 것, 꽂히는 의미 같은 것은 독자의 상황과 캐릭터에 부합하는 것이니까. 사실은 선택에서부터 작용할테고. 그런면에서 오랜만에 인연이 닿는 느낌이 드는 책을 읽은 셈이다.

 

하루키 소설에 나올법한 남자주인공이 등장한다. 물론 미야베 미유키는 하루키가 아니므로 그렇게 쓰지는 않는다. 이 주인공은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나중에 알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누군가'의 주인공이다. 일종의 연작 시리즈인듯) 마치 사립탐정같은 조심스러움과 과감함으로 사건의 진상을 알아간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런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아니다.

 

갑자기 휘말린 사고, 그로 인해 생긴 역시 갑작스러운 돈. 노력하지 않고 얻은 돈이 놓여진 등장인물들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큰 노력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어요- 라고 속삭이는 구렁텅이를 보여준다. 우리 모두 알고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지만 너무 익숙해서 그냥 지나치는 그런 전단지들. 그런 사람들. 호구를 기다리는 까마귀들. 어떤 까마귀는 잡히지만 더 큰 검은 새들은 짧게 뛰고 멀리 날아가버린다. 내 스스로 노력해서 손에 넣지 않은 돈에는 위험이라는 옵션이 따라붙는다. 그게 어떤 형태이든.

 

어디 일확천금 없나, 눈 먼 돈 없나 하고 있었는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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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재능. 책 읽고 잡소리.

 

 

 

어렸을 때 가장 자주 들은 질문 중의 하나는 "넌 꿈이 뭐니?" "장래희망이 뭐니?" 이거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가 아니라.

 

나는 어렸을때 꿈이 없는 어린이였기 때문에 이 질문이 매우 짜증났다. 아니 대체 태어난지 얼마 안돼 아직 세상도 모르겠고 나도 모르겠는데 미래 따위 알 게 뭐람. 언제나 대충 적당한 대답을 둘러대곤 했다. 그래서 별로 되고 싶지도 않은 피아니스트 라든가, 과학자 같은 걸 써내곤 했다. 그러면 어른들도 별 말이 없으니까. 아무리 어려도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서혜경이라든가, 정트리오 얘기가 한창 신문에 심층기사로 나던 시절이란 말이지. 아 물론, 그들도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거나 과학자가 될 거라곤 생각 안했을거다. 심지어 어릴때 내가 생각했던 과학자는 로보트 태권브이 만드는 사람이었는 걸 뭐.

 

내가 나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을때, 그러니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뭘 할 때 때려치고 싶은 생각이 늦게 들고 좀 오래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생각할 능력이 됐을 때 나는 갑자기 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그 중 일부는 재능은 있으나 노력을 안해놔서 물 건너간 것들이었고, 일부는 제법 해볼만한 것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나는 그 중 무엇을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나름 해냈을 것 같고, 나름 즐거워했을 것 같다. 좀 아깝기도 하다. 타이밍은 좋았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되어있었던 것이. 뭐 바로 그게 재능이 없단 증거지만.

 

다만 단 한 번도 되고 싶다거나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글쓰는 업이다. 정말 단 한번도 없다. 내가 글로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러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굳이 마음을 먹었다면 비슷한 업계에 어떻게라도 발끝 정도는 걸치고 살 수 있었지 싶은데. 실제로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말처럼 작가가 엉덩이 힘으로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구말처럼 어떻게 글을 쓰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이 책을 읽으니 그냥 이건 재능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더 크게 든다. 이걸 27살에 썼단다. 어허허허허허허허

 

안 그래도 읽으면서 끝마무리가 허술하다든가, 어딘지 모를 치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생각은 했더랬다. 생각해낸 범죄방법이라든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같은 것도 좀 디테일하지 못하고 짧기도 하고. 그래도 그렇지 27살에 이런 걸 써낼 수 있는 사람은 한 나라당 한 두 명일걸. 게다가 미미여사는 장편도 잘 쓰는데 단편도 잘 쓰고, 무서운 것도 잘 쓰면서 유머러스한 것도 잘 쓴단 말이지.

 

그런걸 보면 내가 그런 허황된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다. 강유원씨도 말했지만 진짜 비극은 바로 그런거지. 알지 못하고 하지 못하는 것, 혹은 알지 못하고 하는 건 비극이 아니다. 하지 못하는 걸 아는데 하고 싶은게 비극이지.

 

사실 내가 보기엔 미야베 미유키 같은 작가보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가 되기가 더 어려운 거 같은데. 미야베 미유키를 흉내내는 사람보다 하루키를 흉내내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아이러니다. 아무래도 하루키는 세상에 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어쨌든 미야베 미유키도 굉장한 다작이다. 재능이 흘러넘치는 것 만큼이나 성실함이 흘러넘치는 건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그 자체가 재능이자 핵심인거지. 끊임없이 어떤 일에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재능. 계속해서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초점을 모아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들일 수 있는 재능.

 

나는 아무래도 소비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어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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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사람들



어릴 때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장래에는 엔지니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엔지니어라는 말에는 어딘지 선구적 사람이라는 울림이 있었다.
고등학생쯤 되자 아니나 다를까, 그런 환상은 사라지고
엔지니어란 기술직 샐러리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길로 나아가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p.89


이 부분은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만능스포츠맨에 이공계-전기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로 틈틈이 소설을 썼던게 시작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들도 물리학자(탐정 갈릴레오), 수학자(용의자 X의 헌신), 검도의 달인(가가 교이치로) 등등 그런 면이 반영이 되어 있다.

난 이 단편집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그 중 하나는 등장인물을 매 단편마다 죽이지 않고도-_-  작가의 재기발랄함과 서스펜스를 충분히 이끌어냈다는 게 이유고,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녹아들어있다는 게 두번째다.

특히 「죽으면 일도 못해」라는 단편은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정말 어이없지만, 범죄가 일어나는 원인은 다른 게 아니라 욱해서-라는 말이 확 다가오는 이야기라 웃으면 안되는데 이거 어이도 없고, 이해가 가면 안되는데 솔직히 이해도 가고.. 뭐 이런-_-  제목에서도 말해주듯이 죽으면 일도 못한다. 너무 아웅다웅 빡세게 일하지 말자. 남 생각 전혀 안하고 자기 혼자 완벽주의자로 다른 사람 몰아치는 것도 욕먹을 짓이고.
 
「결혼보고」라는 단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오해인지 아닌지는 풀려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지요.
판정을 내릴 수 없을 때는 그냥 믿는 거예요. 
그러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지요.
상대의 행동만 생각하면 좀처럼 오해는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쪽으로 꼭 한번 생각해보세요.


실천이 어려운 말이다. 윤종신이 야행성에서 말하길, 자기가 어렸을 때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서 의심병 어른;으로 자라났다고 농담했는데 나도 괜히 뜨끔; 아무리 돌이켜 곰곰히 생각해봐도 사람을 믿는다는 어려운 일을 굳이 극기해나가면서까지 하기보다는, 의심해야 할 때는 당연히 의심해야지. --_-- 다만 의심하는 걸 일로 삼아야 되는 직업을 갖지 않고, 의심할 상황 많이 겪지 않고, 의심해야만 하는 사람들 덜 만나고 사는 것도 복이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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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e to me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어떤 사람들은 완벽한 거짓말을 하려면 절반쯤은 진실을 섞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바늘을 숨기려면 바늘더미 속에 숨겨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하여간 뭘 숨기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거짓말을 숨기려면 더 큰 거짓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또 어디 쉬운가. 먼저 한 말과 모순은 없는지, 놓친 건 없는지, 얼떨결에 진실을 말한 건 아닌지 골아프게 계산해야 되니까.

가가 교이치로는 그렇게 입체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용의자를 숨막히게 하는 데가 있다. 다른 여러 추리소설가들이 탐정의 외양이나 능력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는 것과는 달리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가와 용의자가 주고받는 대화에 더 비중을 둔다. 슬쩍 슬쩍 던지는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고, 긴장을 풀 수 없게  불쑥 나타나는데다가 집요하기까지 하고,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내가 대답을 잘 한건가? 실수했나? 왜 묻는거지? 계속 불안하게 만든다.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독자는 추리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고-이 단편집이 가장 그렇다.

다섯 편의 단편으로 되어 있는데 재밌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라고 교보문고 작가평에는 써있던데 확실히 작가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따라가다보면 그런 연대기적 변화도 알 수 있겠다.  난 닥치는대로 뽑아 읽다보니 오? 이건 좀 다른데? 하고 생각할 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무 쉽게 죽인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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